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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04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나는 종종 애인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내가 만난 모든 애인들에게 그랬다. 시를 읽어 줄 때도, 소설을 읽어 줄 때도 있었다. 문학을 전공했던 애인은 시큰둥했고 공대 애인은 네가 쓴 거냐고 물었다. 운동을 좋아하던 애인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내가 무슨 낭만을 위해 그렇게 책을 읽어준 것은 아니었다. 주로 통화할 때였는데, 서로 할 말이 끝난 후의 어색한 침묵, 그럼 안녕 하고 끊기에는 애매한 타이밍, 뭐 그런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거였다.


그날도 통화를 하다가 침대에 아무렇게나 엎드려 애인에게 시를 읽어주기 위해 책장을 찰박 찰박 넘기고 있을 때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애인이 입을 열었다.


근데 인경아, 나 지금 되게 설레고 좋아.

뭐가?

네가 나한테 읽어주려고 책 넘기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 그는 내 표정을 못 보았겠지만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사랑스러워 웃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미소가 나올 만큼. 가장 짧게 만났던, 철학을 전공하던 애인이었다.


그날 내가 읽어 주었던 시는 문정희 시인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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