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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4 존버의 기술
봄이 시작될 무렵, 바질 씨앗을 심었다. 마치 볼펜으로 콕 찍어 놓은 점처럼 작은 이 씨앗 속에 정말 생명이 들어 있긴 한 걸까 의심스러웠다. 일주일이 지나자, 작고 연약한 떡잎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옳다구나 분갈이할 화분을 준비하고,...
23.01.24 상경 10주년
2013년 1월 24일,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눈보라 치던 휴게소의 풍경과 가난한 짐을 실은 1톤짜리 트럭, 내 무릎 위에서 잠들어있던 고양이를 기억한다. 순천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취업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았지만 상경 날짜가 다 되어...
22.04.10 남산에 왔었다
언젠가 남산에 간 적이 있다. 그 애는 서울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고 싶어 했다. 비가 올 듯 하늘이 흐렸고 그래서 영 내키지 않는 외출이었지만 그 애는 부드럽게 나를 설득했다. 며칠 후 나는 인도로 떠날 참이었고 서울에서 그 애를 만날 시간도...
21.05.17 소주 먹고 싶다
소주 한 병을 잔에 나누어 담으면 총 일곱 잔이 된다고 한다. 행운의 럭키 세븐 같은 뜻이 아니라 좀 더 상업적인 이유가 있다. 잔을 가득 채워 나누었을 때, 두 명이서 석 잔씩 마시면 한잔이 남아 한 병을 더 따게 되고, 세 명이서 두 잔씩...
19.12.31 아직 반짝반짝해
2019년은 유난히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연례행사처럼 사진첩을 찬찬히 거슬러 가보니 바쁘긴 참 바빴구나. 봄에는 낭독회, 여름엔 광시증, 가을엔 겉멋프로젝트, 겨울엔 온갖 파티와 행사들. 잠시도 쉬는 기간이 없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안...
19.11.20 사과는 달고 따뜻해
'배려'는 내가 사람을 사귈 때 가장 먼저 따지는 조건이다. 그것은 단순한 친절에서 보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 깊은 태도에서 느껴진다.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얼마만큼 나를 생각해 주는지, 서로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19.10.10 다음에
백작가, 백주임, 프리토토엄마. 백인경이라는 이름 외에도 나를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다. '젤리이모'도 그중 하나다. Y언니의 딸인 시연이는 다섯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배려 깊고 얌전하다. 주위 사람을 챙기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렇게 앙증맞을...
19.10.05 함께 개다리춤을 춘다는 것
T와 J와 셋이서 어두운 골목길을 걷다가 갑자기 개다리춤을 췄다.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그래 가끔 그러고 싶을 때가 있어. 하며 J는 웃었고 T는 옆에서 같이 개다리춤을 춰주었다. 추고 싶으면 춰야지! 너도 해봐! 하고 우리가 J에게 권하자...
19.09.11 칫솔 정리
신림에서 살던 시절엔 욕실에 칫솔이 여러 개였다. 역과 거리가 가까워 찾아오기 편한 위치였기에, 지방에서 후배들이나 친구들이 올라오면 으레 우리집에서 재우곤 했다. 내가 베개를 빌려준 사람들은 다 특별하거나 친밀한 이들이었다. 가족, 사촌동생들,...
19.07.31 사람 인 서울 경
백인경. 성에는 흰 백(白)자를 쓴다는 걸 알았지만 이름의 뜻은 사람 인(人)자에 서울 경(京)자겠거니, 멋대로 해석하던 때가 있었다. 잘 끼워 맞추면 그럴듯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 사람이 되라는 뜻인가. 사실 그땐 아는 한자도 별로 없었다....
19.07.22 조금씩 자주
그러고 보니 내가 가스레인지를 언제 마지막으로 썼더라? 설거지 도중 문득 궁금해져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억력 하나는 꽤 좋다고 자부했는데 도통 빠르게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새삼스러운 사실이 둥실 떠올랐다. 나 정말 집에서 요리 안 해...
19.07.10 흔들의자가 있는 곳
엄마와의 통화에서 왜 갑자기 그 광경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등에 업은 아기를 어르며 빌라 앞을 서성이는 젊은 엄마를 보았다. 아기 엄마가 나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여서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업힌...
19.06.24 희망 요절 사항
첫 번째 시소 모임 때는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낭송했다. 그리고 서른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W가 내뱉은 말이 나를 멈칫하게 했다. 더이상 죽음 뒤에 '요절'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 나이가 아닐까. 요절. 이십대...
19.06.16 낯 가리고 아웅
낯[낟][명사]: 눈, 코, 입 따위가 있는 얼굴의 바닥. 나는 정말 정직하게 '낯'을 가리는 사람이다. 갤러리 스탠에서 열린 낭독회 때는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나는 계단 아래 구석에 숨어 낭송할 시만 중얼대고 있었다. (아마도 보다...
19.05.03 아가미의 흔적
수영을 배울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물속에 얼굴을 '처박는' 것이었다. 귀와 코에 물이 들어가는 게 두려웠고 죽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범람 같은 것. 무언가 내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 이래서는 안 되겠어. 3년 전, 쿠바에서의 일정 중...
19.04.20 명동
서울편지 02. 명동 -주임님 운동가세요? -네. 데이트가세요? -네, 명동 가요. -여기서 명동 가는 버스가 있어요? -바로 근처까지 한 번에 가는 게 있긴 해요. 내려서 좀 걸어야 하지만. -그러고 보니 명동 간지도 엄청 오래 됐네요. 서울...
19.04.08 귀를 기울이면
사랑하는 것들의 배에 귀를 대고 누워있는 걸 좋아했다. 무방비 상태로 벌러덩 잠든 고양이의 배에 가만히 귀를 대보면 심장이 바쁘게 뛰는 소리가 들린다. 이 작은 몸뚱아리 속에 심장도 있고 폐도 있고 간도 있고 아무튼 그런 것들이 오밀조밀 다 모여...
19.02.22 시절 인연, 제철 사랑
언젠가 주방에 서서 사과를 깎아 먹다가 P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나 사람들이 왜 결혼하는지 알 것 같아. 왜? 과일 같이 먹으려구. 나는 집에서 혼자 술도 잘 마시고 아프면 씩씩하게 죽도 끓여 먹는다. 하지만 과일만큼은 혼자 먹는 걸 싫어한다....
19.02.08 연희동
서울편지 01. 연희동 2013년 1월 24일에 서울에 올라왔으니 그 날은 1월 28일쯤이었을 거다. 짐을 푼 후 곧장 찾아간 곳은 연희동이었다. 연희문학창작촌. 거기 가면 작가 한 명쯤 우연히 마주치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면서. 혹시 길을...
18.12.16 곽쌤 이야기2
(섬진강변의 한 민물 메기 매운탕 집.) (반찬이 놓인다.) 나: (수저를 놓으며) 저는요, 쌤. 제 책이 잘 팔리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한 권을 다 끝까지 읽어주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아요. 쌤: (너털웃음) 인경아, 나도 시집이 나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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