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0 다음에
- 백인경
- 2025년 7월 26일
- 2분 분량
백작가, 백주임, 프리토토엄마. 백인경이라는 이름 외에도 나를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다. '젤리이모'도 그중 하나다. Y언니의 딸인 시연이는 다섯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배려 깊고 얌전하다. 주위 사람을 챙기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렇게 앙증맞을 수가 없다. 보고 있으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시연이는 뭐가 제일 좋아? 젤리! 나는 당연히 다음번 만남에서 젤리를 짠, 하고 내밀었고 젤리이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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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Y언니네 집에서 술자리가 열린 날, 우리 집과는 거리가 꽤 되기 때문에 언니가 직접 나를 데리러 왔다. 시연이와 나는 뒷좌석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연이는 내가 뭔가 물을 때마다 한 박자 후에 수줍고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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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아, 너 자전거 배웠다며? 되게 잘 탄다며?
응...
대단하다. 이모도 얼마 전에 자전거 배웠어.
이모도?
응. 담에 이모랑 같이 자전거 탈까?
응.
자전거 탈 때 조심해야 해. 이모는 넘어져서 여기 다쳤어.
나는 킥보드 보호대는 있는데 자전거 보호대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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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이는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는 동안 옆에 앉아 뽀로로 과자를 나누어주었고 나는 삶은 밤을 까서 입에 넣어주었다. 시연이 이제 머리 감아야지. Y언니의 남편이 시연이를 안고 갔다가 난처한 얼굴로 돌아왔다. 시연이가 그 뒤를 따라와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쭈뼛쭈뼛 맴돌았다. 시연아 왜 그래? 이리와, 이모한테 와. 팔을 벌려도 도리질을 하며 손을 꼼지락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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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이가 젤리이모랑 자전거 타기로 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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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맥주를 마시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담에 이모랑 같이 자전거 탈까?' 그러니까 다섯 살 시연이에게 있어 다음은 오늘 저녁이었던 거다. 사실 다음에 언제 다시 온다고 약속한 게 아니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시연이는 젤리이모가 곤란할까 봐 떼를 쓰지도 못하고 소근소근 아빠한테만 '젤리이모랑 자전거 타기로 약속했는데...' 그러곤 씻지도 못하고 기다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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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약속했으면 가야지! 하고 모두 일어나 야밤에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며 자전거를 탔다. 놀이터에서 시소와 미끄럼틀을 타고 그물 사다리에 올랐다. 시연아, 이모 무서워! 하자 아냐 이모 하나도 안 무서워. 나 하는 거 보고 따라와. 하며 시연이는 씩씩하게 발 디딜 곳을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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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지나는 말로 조만간 주말에 한번 보자. 하면 주말 약속을 싹 비워놓던 때가 있었다. 꽤 여러 번 홀로 서운함을 느낀 이후로는 누군가 '다음에'라고 말할 땐 진심으로 다음을 기약하지 않게 되었다. 혹은 다음에 언제? 지금 확실하게 날짜랑 시간 잡자. 하고 못 박아두거나. 그래서 갑작스럽게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차라리 두근거리며 날짜를 기다리는 일이 더 많았다. 계절이 지나기 전에 서울에 놀러 오겠다던 친구들에게는 꼭 미리 날짜를 알려달라고 했다. 날짜도, 사람도 오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이상하게 섭섭하지 않았다. 내가 더는 섭섭하지 않다는 사실이 섭섭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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