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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0 남산에 왔었다

언젠가 남산에 간 적이 있다. 그 애는 서울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고 싶어 했다. 비가 올 듯 하늘이 흐렸고 그래서 영 내키지 않는 외출이었지만 그 애는 부드럽게 나를 설득했다. 며칠 후 나는 인도로 떠날 참이었고 서울에서 그 애를 만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 그 애는 최대한 덜 걷는 코스를 짜왔고, 곁에서 계속 부채질을 해주었다.

버스를 타고 남산타워에 도착하자 부슬비가 내렸다. 우리는 함께 우산을 쓰고 걸었지만, 그 애가 입은 티셔츠 어깨는 누가 봐도 확연히 젖어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도 비 맞는 게 싫어서 모른 척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자물쇠 전망대였다. 그땐 한창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유행했었고 언젠가 술자리에서 '나도 서울 가면 거기 한번 가보고 싶다. 남산에 자물쇠 거는 곳.'이라고 싱겁게 중얼거린 걸 기억하고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안개 때문에 전망도 흐렸고 그나마도 우후죽순 자물쇠들이 시야를 가리는 통에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내 입술이 단단해지자 그 애가 조심스레 물었다.

- 우리도 저거, 자물쇠 살까?

- 됐어. 뭘.

내심 실망한 나는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 생각보다 별거 없네...

그 애는 머쓱한 듯 하하하 웃었는데, 그 말간 웃음을 마주하자마자 나는 그런 말을 내뱉은 걸 후회했다. 오래전 일이다.

그리고 어제 오후, 혼자 남산에 올랐다. '언젠가 남산에 간 적이 있다.'라는 기억만 가지고 길을 찾는 건 무리여서 이리저리 꽃구경도 하고 조금은 헤매면서, 타박타박 언덕길을 올랐다. 오래전 그 애를 떠올리며 향한 것도 아니었고, 솔직히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그냥 날씨가 좋아서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남산은 내가 이곳에 온 적이 있나 싶을 만큼 낯설었다. 낯설지만 여전히 별거 없었다. 북적이는 커플과 가족들 사이를 빈둥빈둥 느리게 돌아다니다가 생각 없이 오른 계단 끝에서, 그 장소를 발견했다. 우후죽순 무겁게 매달린 자물쇠들, 여전히 희끄무레한 서울을.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채색되었다. 먼 곳에서 촉촉한 감정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다 사라졌는데, 그건 마치 비 개인 후의 무지개에 가까운 아름다움이었다. 더 이상 이곳은 나에게 별거 없는 장소가 아니게 된 것이다.

언젠가 남산에 간 적이 있다.

라는 기억의 먼지를 걷어내자 마치 선물처럼, 추억으로 변한 그날이 있었다.

스물 세 살 여름, 나는 그 애랑 남산에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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