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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7 소주 먹고 싶다

소주 한 병을 잔에 나누어 담으면 총 일곱 잔이 된다고 한다. 행운의 럭키 세븐 같은 뜻이 아니라 좀 더 상업적인 이유가 있다. 잔을 가득 채워 나누었을 때, 두 명이서 석 잔씩 마시면 한잔이 남아 한 병을 더 따게 되고, 세 명이서 두 잔씩 마시면 또 한잔이 남아 한 병을 추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잔술이 남아 다 함께 건배하기 위해선 소주를 추가하고, 또 추가하게 된다는 소리인데... 고도의 마케팅 전략인지, 술쟁이 선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풍문인지 확실치는 않아도 꽤 그럴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술자리에 나 같은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나는 깡소주를 못 마신다. 그 사실은 한때 내게 꽤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소주를 멋있게 마시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소콜(소주+콜라)이라니. 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사연 있는 주인공처럼 소주병을 기울이고 싶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콜라 대신 사이다로 눈속임 한다 쳐도 소주잔 속으로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 게 아무래도 모양 빠지는 거다. 낯선 이가 잔에 소주를 채워주면 늘 유심히 용량을 노려본다. 약 38~52% 소주가 채워지면 스톱! 을 외치고는 꼴꼴꼴... 콜라를 섞는다. 그래서 소주는, 웬만하면 혼자 마신다. 나의 소콜 비율을 정확히 아는 친한 친구들과 마시거나.

한번은 진짜 소주 마시는 여자가 되어보겠다며 P와 둘이서 깡소주를 까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와... 진짜 아세톤 냄새나서 못 마시겠다….' 하고 백기를 들어버렸다. 그러자 P가 은밀하게 비법을 알려주었다.

소주 마시고 코로 숨 쉬지 마. 입으로 숨 쉬어. 그럼 냄새 안나.

오호라, 그런 방법이? 싶어서 꼴딱꼴딱 코를 막고 소주를 마셔댄 다음 날,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와 진짜 제가 잘못했습니다. 화장실 앞에 쓰러져 내가 아는 모든 신께 싹싹 빌었지만.

요즘도 가끔, 맥주도 청하도 막걸리도 와인도 아닌 유독 소주가 당기는 날이 있다. 내 입에서 '소주 먹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친구들은 소주 맛도 모르면서 허세만 부린다면서 놀린다.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도 처음처럼, 참이슬, 진로, 화이트, 좋은데이가 어떻게 다른 맛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말 맞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소주 맛도 모르고 겨우 콜라나 깔라만시 원액이나 토닉워터를 섞어 마시는 주제에 야금야금 두 병쯤은 거뜬히 비워내는걸.

내가 마시던 참이슬 병을 진로로 바꿔놓아도 아마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내가 어떤 감정으로, 무슨 생각으로 마시는지는 안다. 혼자 소주를 마시는 날은 많이 읽고 많이 쓴다. 독한 진심을 삼키기 버거울 때면, 어떤 핑계라도 섞어 들이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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