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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은 버려주세요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어린 동생은 아침마다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복통 의사만이 증명해주었다 어머니, 얘는 지금 배가 고픈겁니다 약사가 알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항상 얼어있던 컵 속에 물처럼 주머니 속에 넣은...

담론(fence)

담론(fence) 그날 쏟아진 것에 대해 우리는 의견을 나눈다 뜨거운 토마토 스프 그러기엔 핥아줄 게 없었고 이백이십 볼트의 유성우 그러기엔 어두웠고 찬장 속 세제가루 그러기엔 건조했고 서로의 신발 속에 넣어 둔 작은 돌 그러기엔 너무도 적나라한...

성분들

성분들 검은 봉지에 바게트를 담고 돌아왔다 그 집 빵은 오전에 다 팔린다더라 화병에 꽂아둔 푸른 바게트 밤에 바라보면 더 애틋해지는 그 날 거스름돈을 받았던가, 헷갈렸지만 벌써 나를 잊었을 것 같아 외투만 벗으면 괜찮아졌다 그것도 모르고 계산이...

스프링클러

스프링클러 너 이후로 모든 비들이 상징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비 창문 안으로 들이닥치는 비 맞아도 되는 비 되도록 투명한 우산이 필요한 비 비가 되기 위해 내리는 비 비가 그쳤나 네가 창 밖으로 손을 뻗었을 때 옥상 난간에...

피전 슈팅

피전슈팅 도시의 참새가 다 자라면 비둘기가 된대 나는 다 자란 이야기를 피해 걷는다 겨우내 쪼아두었던 아스팔트가 출렁일 때쯤엔 어떤 악필도 아름다울 수 있대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닷물로 쓴 편지를 비둘기 발목에 묶었다 낯선 비둘기가 보이면...

잘하는 집

잘하는 집 - 너도 아는 그 집2 너 꼭 헤엄치는 것 같아 숨을 헐떡이며 물 밖으로 올라왔을 때 집이 또 낯설어졌다 가끔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두루치기를 잘하는 집에서 생선 백반을 시키다니 헤어짐이 잦은 이 집에서 사랑을 말하다니 무쇠...

내가 좋아하는 과자

내가 좋아하는 과자 내가 좋아하는 과자는 달고 딱딱한 형태 앞니에 잘 끼이는 검정 입을 가리고 짓는 표정 나는 그걸 걔한테 주고 싶어 걔가 보고 있던 나를 본다 열대과일은 말리면 더 달콤해진다는데 본 걸 또 보고 있으면 점이 자꾸 커지는 것 같아...

19.09.03 맥시멀리스트

⠀19.09.03 맥시멀리스트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나는 '버리는' 행위 앞에서 늘 망설인다. 얼른 변명해보자면 쓰레기를 집안에 모아둔다는 건 아니고, 뭐든 이왕 버릴 거라면 끝까지 알차게 사용한 후 버리거나, 버리기 보다 어떻게든 활용할 수...

20.07.27 내일의 날씨는 흐리다 떨림

20.07.27 내일의 날씨는 흐리다 떨림 (글로소득 7월호에서 발췌) - 백작가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아침 열 시, 작업실 문을 여는 나를 향해 드리머 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초췌한 몰골로 대답한다. - 집에 동생이 와...

20.06.27 바보들의 고백법

20.06.27 바보들의 고백법 (글로소득 6월호에서 발췌) (중략) P는 아마 나의 우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본 친구일 것이다. P 앞에서 나는 늘 둑이 터지듯 울 수 있었다. P는 내가 스스로 울음을 그칠 때까지 꼭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글루

이글루 거기가 그렇게 좋으면 평생 거기서 살아 엄마는 갈 거야 그러던 엄마가 진짜로 사라졌을 때 별안간 어른이 돼버린 거지 여긴 내가 언젠가 엎어버린 밥그릇 속처럼 따뜻하고 살 만 해 그러니까 그냥 가 모서리가 없는 방에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19.05.10 냉정과 다정 사이

19.05.10 냉정과 다정 사이 - 나 지금 가방 삐뚤어졌나 좀 봐줘. 오랜만에 멘 백팩은 아무리 어깨끈을 조절해도 자꾸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내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J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 가방이 아니라 누나 어깨가 삐뚤어졌는데? -...

19.03.22 비밀번호 인사불성

19.03.22 비밀번호 인사불성 서울에 온 지 일 년도 안 됐을 때, 여대에 다니던 사촌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학 기간 기숙사에서 나가야 하는 데 일주일 정도 언니네 집에 묵어도 되냐고. 나 역시 고등학생 때 백일장을 핑계로 서울에 살던...

19.03.01 J오빠 이야기

19.03.01 J오빠 이야기 시인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J오빠를 말한다. J오빠 같은 사람이 여태 등단을 못했다면, 등단제도라는 건 적어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그런 생각도 시집 출간을 결심하는 데 한몫했다. 그는...

트램폴린

트램폴린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애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때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넘어졌다 어떻게 끝내는 게 가장 아름다울지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마지막 자세를 고민했다 번갈아 가며 추락하다가 허공에서...

19.01.04 외로움의 기원

19.01.04 외로움의 기원 초등학생 때 나는 그야말로 왈패였다. 사고를 자주 친 건 아니지만 일 년에 한 번씩은 남자애들이랑 주먹다짐을 했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성격도 괄괄해서 시비를 거는 남자애들이 많았다. 싸움을 걸어오는 애들을 피해...

18.12.12 둘레 이야기

18.12.12 둘레 이야기 둘레(around) 엄마의 원래 이름은 둘레다. 엄마 위에 있던 세 명의 언니들은 모두 이름에 ‘자’자 돌림이 붙었다. 아들이 귀한 집이라 아들(子)자를 쓴 이름이지만, 자야- 하고 부르기엔 꽤 다정스러웠을 것이다....

18.10.10 곽쌤 이야기

18.10.10 곽쌤 이야기 언니들은 첫 아기를 낳을 때 엄마 생각이 제일 많이 난다고 했다. 첫 시집을 준비하는 나는 요즘 곽쌤 생각이 제일 많이 난다. 곽재구 선생님께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오히려 낯설다.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나는...

박서빈씨에게

박서빈씨에게 낯모르는 당신의 이름이 내 우편함에 쌓여 가요 서빈씨 이번 달 건강보험료는 잘 내셨나요 나는 매달 잠시 걱정합니다 당신은 나 이전에 이 주소의 기억으로 살다 떠난 사람 혹은 나와 함께 살면서 마주하지 않는 사람 유령이라기엔 다정하고...

서울 오면 연락해

서울 오면 연락해 누가 온다고 한 것처럼 냄비를 데우고 칫솔을 샀다 너는 떠나기 전 양치질을 하는 습관이 있어 매운 치약을 다 삼키고 엄살을 부리는 게 내 몫이었지 뱉어놓은 침 모양대로 아스팔트에 얼룩이 졌다 집 밖의 일은 늘 모호했지만 1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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