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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2 비밀번호 인사불성

19.03.22 비밀번호 인사불성



서울에 온 지 일 년도 안 됐을 때, 여대에 다니던 사촌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학 기간 기숙사에서 나가야 하는 데 일주일 정도 언니네 집에 묵어도 되냐고. 나 역시 고등학생 때 백일장을 핑계로 서울에 살던 사촌 언니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지라 흔쾌히 허락했다.


- 언니 출근하면 집에 없으니까 네가 문 열구 그냥 들어와서 쉬고 있어.

- 응. 비밀번호 뭔데?

- 비밀번호? 음…


나는 전주인이 쓰던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쳤다 싶지만 그때는 정말 경계심이라곤 없었나 보다. 몇 달이 지나자 머리로 외워서 번호를 누른다기보다 그냥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동생이 비밀번호를 물어봤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뭐였지… 200….615…*….? 지금 말구 내일 알려줄게. 내일 언니 집 앞에서 전화해. 얼렁뚱땅 전화를 끊고도 계속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번호를 바꿨어야 했다.


다음날 집을 나서면서 문을 닫는 순간, 아차 비밀번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계를 확인하곤 그대로 출근해버렸다. 자꾸 기억해 내려고 생각하니까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까먹고 있어야겠다. 오후에 사촌 동생에게 메시지가 왔다. 언니, 비밀번호가 뭐야?


거의 10개의 번호를 다 실패했을 때 나는 패닉에 빠졌다. 언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와 배낭을 짊어진 동생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 언니 오피스텔 밑에 부동산 있지? 거기 짐 잠시 맡겨두고. 너 어디 약속 없어?

- 왜?

- 나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나. 퇴근하면 생각날 것 같애.

- 뭐?


어이가 없었겠지만 착한 동생은 언니가 시키는 대로 했다. 퇴근 후 회사 문을 열고 나오면서부터 직감할 수 있었다. 망했다, 고.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기억을 하려 하면 할수록 번호는 더 뒤죽박죽이 되었다. 집 앞에서 만난 동생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동생은 그럼 우리 어떡해? 하고 물었다.


- 지금 내 머릿속에서 번호가 전혀 기억이 안나잖아?

- 응…

- 그러니까 술을 먹자. 이건 지금 내가 술을 마시고 싶어서가 아냐. 언니 내일 회사 워크샵 있어.

- 술 먹자고? 지금?

- 그래. 손은 기억 할거야. 확 취해버리면 손이 알아서 열어 줄 거야.

- 그러다 안 열리면? 언니 내일 워크샵은?


태어나서 닭발을 그렇게 비장하게 뜯은 적은 처음이었다. 일부러 못 먹는 소주를 주문하고 훌렁 훌렁 술잔을 들이켰다. 동생이 앞에서 걱정스럽게 알코올농도를 체크했다. 언니 정신 있어? 응. 얼마나 더 마셔야 돼? 아이 왜 이럴 땐 술도 안 취하냐.


전화로 근처에 살던 주까지 불렀다. 지금은 마산으로 돌아갔지만, 주는 나보다 서울 선배였다. 밴드를 하는 주는 노래도 잘 부르고 기타도 잘 쳤다. 나는 막무가내로 말했다.


- 나 술 취해야 하는데 술이 안 취해. 너 기타 좀 들고나와.


도림천 강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몇 곡이나 불러 재꼈을까. 겨우 취기가 올라왔다. 술을 얼마나 더 마셨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여하튼 셋이 한마음으로 백인경 취해라, 취해라 하면서 무지하게 부어 댔을 것이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나는 주와 동생의 도움을 받아 비틀거리며 문 앞에 섰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움직이자,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동생에 말에 따르면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고 문이 열린 기념으로 맥주를 더 마시자고 떼를 썼다고 한다. 결국 주가 캔맥주 몇 개를 더 사 왔지만 그걸 다 먹지도 못하고 나는 뻗어버렸다.


그 다음날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봄이 오면 언제나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다. 그날 도림천에서는 주의 자작곡을 불렀다. 나는 목이 상한다며 탄산음료조차 입에 대지 않던 중학생 주를 기억한다. 마산에서 주를 만나면 나는 요즘도 노래해? 하고 묻고 주는 가만히 웃는다. 그냥, 가끔 버스킹이나 하고, 취미로 하는 거지. 둘 중 하나가 ‘노래 부르자.’ 하면 나는 어디서라도 노래를 부르고 주는 어디서라도 기타를 쳐준다. 인경이 넌 요즘도 술 많이 마시냐? 주는 항상 내 건강을 제일 걱정하고 나는 그의 꿈을 걱정하지만.


그래,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그냥 취하다 보면 열릴 거야. 우리 같이 봐서 알잖아. 그런 말을 하려다가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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