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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12 둘레 이야기

18.12.12 둘레 이야기



둘레(around)

엄마의 원래 이름은 둘레다. 엄마 위에 있던 세 명의 언니들은 모두 이름에 ‘자’자 돌림이 붙었다. 아들이 귀한 집이라 아들(子)자를 쓴 이름이지만, 자야- 하고 부르기엔 꽤 다정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다 넷째마저 덜컥 딸이 태어나니 집안 어른들은 그만 둘레둘레 둘러가고 아들 좀 낳자고 이름을 둘레로 지어버렸다.

둘레, 하면 몽당치마에 숱 많은 단발머리, 그을은 얼굴로 팔랑팔랑 논두렁을 걷는 시골 소녀가 생각난다. 어찌나 마음이 여렸는지, 엄마보다 나이도 어린 막내 이모가 ‘야이 가시나야!’ 하고 빽 소릴 지르면 울어버렸다고 한다. 이모랑 둘이 서서 외할머니에게 혼이 나다가 두리번거리며 매라도 찾을 때면, 둘이서 후다닥 대문 밖으로 달아났다. 죽자 살자 동구밖으로 내달린 이모와는 달리 ‘야 이년들 거기 안 스나!’ 외할머니가 소릴 지르면 엄마는 우뚝 섰다. 외할머니는 훌쩍거리고 서서 도망도 안 가는 미련한 둘레가 기가 막히고 미워서 더 맵차게 손바닥질을 했다.


추자(秋子)

엄마 위에는 세 명의 언니가 있었지만 지금은 둘 뿐이다. 어린 셋째딸이 세상을 떠나고 엄마는 엉겁결에 셋째딸이 되었다. 그 때부터 엄마는 둘레 대신 동사무소에 등록되어 있던 추자라는 언니 이름을 물려 받았다.

엄마가 중학교를 졸업하자, 엄마의 언니들은 아버지를 어떻게든 설득할 테니 고등학교를 가라고 했다. 엄마는 곰곰히 생각했다. 학교에 다니고 싶다. 그러나 밑에 동생만 셋이었다. 결국 씩씩하게 보따리를 싸 마산으로 갔다. 마산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이 있었고 엄마는 3교대로 공장일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 와중에 합창단에 들어갔고, 합창단 단장이 되었고, 서울에서 열리는 합창대회에서 상을 탔다. 엄마는 옆집 언니가 타지 공장에서 버는 돈으로 그 집 동생들 용돈을 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고 했다. 덕분에 막내 이모는 엄한 외할아버지 대신 엄마에게서 부지런히 용돈을 타먹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 늦은 밤 공부하는 모습을 교실에 모인 부모들에게 작은 TV로 보여주었다. 외할머니는 펑펑 우시고, 지금도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신다.

추자는 하루에 스물 시간을 일하고 공부하며 겨우 네 시간씩 자던 여고생이었다. 동생들 용돈을 챙겨주면서도 집에 손 하나 안 벌리고 제 돈으로 시집 가겠다고 악착같이 돈을 모은 처녀였다. 갓난쟁이 딸을 업고서도 집에 부업거리를 쌓아두고, 청소기 부품을 조립하던 엄마였다.

둘레보다 더 강하고 억센 여자였다. 그래야만 했다.


스텔라(stēlla)

엄마에게 영어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놀라웠다. 말하자면 처녀적 이름인 것이다.

여상을 졸업하고 취업했을 때, 과장님이 엄마의 성을 가지고 ‘차차차! 똥차!’ 하고 유치하게 놀려먹자 엄마는 ‘이왕 차로 부를거면 스텔라로 부르세요!’ 하고 팩 쏘아주었다. 그 당시 현대에서 나온 스텔라는 엄마 또래에서 제일 인기있는 자동차였다.

하도 짓궂게 놀려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지만 그 날 이후로 엄마의 별명은 스텔라가 되었다. 30년만에 송년행사에서 만난 상사도 엄마를 기억하곤 이야! 스텔라! 하고 반가워하는 통에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이 이름이 엄마랑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스텔라는 라틴어로 별을 뜻한다. 찰랑찰랑 울음이 넘치려고 할 때마다 쳐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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