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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7 내일의 날씨는 흐리다 떨림

20.07.27 내일의 날씨는 흐리다 떨림

(글로소득 7월호에서 발췌)



- 백작가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아침 열 시, 작업실 문을 여는 나를 향해 드리머 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초췌한 몰골로 대답한다.


- 집에 동생이 와 있어요…


남동생 태가 우리 집에 머무른 지 일주일째다. 아직 집에는 퇴사 얘기를 안 했기 때문에 나는 회사로 출근하는 척 오전 아홉 시에 집을 나선다. 마치 직장을 잃은 가장이 아침마다 넥타이를 고쳐 매고 집을 나서는 것 같다. 거진 팔 년간 성실하게 오전 출근을 해왔는데 고작 두 달 정도의 자율 출근 이후 생활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새벽 다섯 시에 잠들고 정오에나 느긋하게 눈을 뜨다가 다시 오전에 일어나려니 죽을 맛이다. 그냥 누나 퇴사했어. 하고 얘기해 버릴까 하다가 이참에 수면 리듬을 조금 앞당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다.


게다가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잠들기부터가 쉽지 않다. 충분히 운동하고 뽀송뽀송하게 샤워하고 쾌적하게 에어컨을 틀어놓아도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이유는 알 것 같다. 술을 한 잔도 안 마셔서다. 꽤 오랫동안 ‘잠들기 전 한 잔’이 습관처럼 굳어 있었다. 직장인 시절엔 스트레스 때문이었고 지금은 그냥… 별일 없어도 ‘오늘도 잘 살아낸 내 청춘에 건배…’라는 느낌으로 마신다. 끊을 때가 된 거다.


(중략)


태가 2주간 서울에 머물기로 한 이유는 경험을 쌓기 위해서다. 내가 먼저 제안한 거였다. 서울에서의 첫날밤, 태와 나는 광어회에 청하를 마시며 낯간지럽고도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누었다. 태는 완벽주의자인 자신에게서부터 탈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탈출을 위한 계획을 완벽하게 세울 때까지는 실행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태 앞에서 잔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나와 정반대인 성격의 태가 답답해 보였다. 태는 비가 그치면 서울 거리를 혼자 돌아보겠노라 약속했다.


- 서울에서 뭐 하고 싶은데?

- 하고 싶은 게 있긴 한데…

- 혼자 할 수 있어?

- 할 수 있을 것 같다.

- 뭔데?

- 홍대 수 노래방 가고 싶다.

- …


나는 진지하게 홍대 수 노래방에 가면 서울에서의 행복한 시간이 될 것 같냐고 물었고 태는 그렇다고 확신했다. 태에게 오만 원을 쥐여주며 그럼 내일 꼭 가라고 했더니 비가 안 오면 가겠다고 대답했다. 기후 조건마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완벽함을 추구하냐고 물었더니 떨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뭐든 계속해봐야 떨지 않게 된다고, 그렇게 꼰대처럼 대답하면서도 앞으로 걔 앞에 펼쳐질 무수한 떨림의 순간들이 되레 부러웠다.


태와 내가 어렸을 때 자주 했던 놀이는 그림자 밟기였다. 그림자의 윤곽은 날씨에 따라 선명할 때도, 흐릴 때도 있었다. 윤곽이 선명할 땐 서로에게서 죽어라 멀어졌다. 그림자를 밟히면 지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짧고 흐린 그림자 위에서 우리는 더 과감해졌다. 이건 내 그림자가 아니라 화분이야! 내가 네 손 밟은 거 맞다니까! 네가 먼저 밟았니, 내가 먼저 밟았니, 더 큰 소리로 빡빡 우기는 쪽이 이겼다. 대충 기분에 따라 그럼 네가 먼저 1점, 다음엔 내가 1점 하는 식으로 타협하기도 했다. 그림자의 윤곽이 흐릴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알면서도 모른 체 눈감아주는 게 우리의 소박한 의리였다.


어설픈 가짜 직장인 생활을 일주일씩이나 고집했더니 피로가 누적되었다. 내일은 반차를 썼다고 할 거다. 누나가 직급이 높아서 자율적으로 출퇴근할 수 있다고 할 거다. 태는 내가 서울에서 되게 잘 사는 줄 알 거다. 누나는 술도 안 마시고 똑 부러지게 출퇴근도 잘하고 있다고, 태가 증인이 되어 줄 터였다. 마산 식구들이 내 걱정은 조금만 하고 자랑만 잔뜩 했으면 좋겠다. 비록 조만간 또 목욕탕 바가지를 베고 쪽잠을 자게 될지도 모르지만. 무엇을 위해 나는 이러고 있나. 태와 함께 홍대 수 노래방에 가기 위해서다. 평일 할인을 받기 위해서다. 완벽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우리 남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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