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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4 외로움의 기원

19.01.04 외로움의 기원



초등학생 때 나는 그야말로 왈패였다. 사고를 자주 친 건 아니지만 일 년에 한 번씩은 남자애들이랑 주먹다짐을 했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성격도 괄괄해서 시비를 거는 남자애들이 많았다. 싸움을 걸어오는 애들을 피해 다닐 만큼 성격이 유연하지 못해서 방과 후에, 학원 수업 후에, 문방구 앞에서, 교실 뒤에서, 길거리에서 주먹다짐을 했다.


남자애들이 우우 떼거리로 달려들어 한 명이 뒤에서 머릴 잡아당기면 또 한 명이 뒤통수를 치고 달아나는 식이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그중 내 손에 잡힌 한 놈만 팼다. 그러면 나머지 남자애들이 둘러싸고 주먹질을 했다. 길 가던 언니가 뜯어말릴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니 진짜 열 받는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사실 별로 아프진 않았다. 맷집 하나는 타고났던 것 같다. 대신 나는 싸울 때마다 손톱을 세웠다. 입술이 터지고 머리채가 뽑히면서도 누군가의 관자놀이에, 쇄골에 손톱자국을 내놓았다. 싸움이 끝나면 어김없이 그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 집 엄마를 상대하는 건 항상 나였다. 상대 엄마는 너 말구 너네 엄마 바꾸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나는 태연하게 엄마 집에 안 계신데요! 하고 맞받아쳤다. 나도 나름대로 할 말은 많았다. 내가 먼저 시비를 건 적도 없었고 일방적으로 많이 맞은 건 내 쪽이었는데. 그 집 엄마가, 아니 나랑 싸웠던 애들 엄마들이 뭐라 뭐라 나한테 안 좋은 이야기를 쏟아부은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별로 상처받지는 않았나 보다. 꾸중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외로움에 비하면.


그날은 학부모 모임이 있었고 나는 당번이라 선생님께 청소 검사를 맡고 가기 위해 교실에 남아 있었다. 학급 문고를 뒤적거리며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복도 창문 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도착한 학부모들이었다. 처음엔 세 명이었는데 금세 다섯 명이, 일곱 명이 되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쟤야?' 하는 소리에 나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가씨나가.’ 하는 소리도 들렸다. ‘씨’라는 발음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나는 알 것 같았다. 열 한 살치고는 눈치가 빨랐던 것 같다. 저 아줌마들은 지금 내 얘기를 하고 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눈물이 마구 차올랐다.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민망하고 무안하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가 보고 싶다. 머릿속에 그 문장이 떠오르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대로 교실을 뛰어나가고 말았다. 걔가 먼저 싸움을 걸었단 말예요!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아줌마들을 쳐다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겁을 먹은 것과는 달랐다. 그 장소에는 아무도 '내 편'이 없었다. 그날은 태어나 처음으로 죽도록 외로웠다.


나는 ‘우리 집에 왜 왔니’ 놀이를 싫어했다.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민지 꽃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현지 꽃, 지은이 꽃, 민석이 꽃을 누군가 다 찾아가고 나 혼자 남았을 때 팔짱이 텅 비어 버린 그 기분. 고작 가위바위보 한 번에 절실해져야 하는 기분. 내 앞에 길게 팔짱을 잇고 선 아이들은 내가 얼른 져서 이제 그만 다른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그런 눈빛을 읽어버린 기분. 그런 외로움은 나를 잘 울게 했다.


나는 여전히 혼자 있는 게 좋아, 라고 말한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함께에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몇 년 전까지 나는 언제나 쿨 한 척, 강한 척 하는 사람이었다. 나랑 아주 친한 애들이 ‘인경인 겉보기엔 강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여린 애야.’ 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것 봐, 이만큼 나를 은밀하게 잘 아는 사람이 있어. 나도 이런 친구가 있어.


하지만 요즘엔 스스로 이야기한다. 나는 별로 강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내 친구들은 모두 그걸 안다. 내가 힘들어하면 냉철한 조언 대신 이리와 내 새끼 하면서 토닥토닥 안아준다. 나는 씩씩하게 괜찮아! 하고 잔을 부딪치는 사람이 아니라서 거기 안겨서 밤새도록 운다. 그걸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교실 문을 여닫고 뛰쳐나갔는지 모른다. 지금도 울고 싶은 밤이면 모로 누운 귓가에서 쿵쾅거리며 달려나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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