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01 J오빠 이야기
시인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J오빠를 말한다. J오빠 같은 사람이 여태 등단을 못했다면, 등단제도라는 건 적어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그런 생각도 시집 출간을 결심하는 데 한몫했다.
그는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과축제 시 파트의 장을 맡았던 선배였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늘 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나와 동기들이 제대로 시를 써오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대충 쓴 날이면 그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과실로 올라가다가 J오빠와 선배들을 마주쳤다. 어쩌면 그날도 그는 조금 취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꾸벅 인사를 하자 나지막하게 내게 말했다.
- 인경아, 시가 뭐냐.
- 네?
- 시가 뭐냐... 너는 네가 쓰는 게 시 같냐.
모...모르겠는데요... 그러자 J오빠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더니 냅다 바닥에 내리꽂았다. 라이터는 펑 소리를 내며 터졌고 나는 기겁을 했다. 이런 게 시지... 차라리 이게 시지. 옆에 있던 H선배가 야야, 그만해라. 하면서 J오빠를 끌고 갔다. 팔을 포박당한 채 끌려가면서도 J오빠는 인경아! 시 좀 써라! 잘 좀 써라, 좀! 하고 외쳤다. 그때 나는... 뭐 저런 미친 인간이 다 있어. 하고 생각했다.
우리 학교는 과 축제와 더불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도 함께 진행했다. 그래서 특히 시 낭송 무대에 올릴 작품은 교수님의 깐깐한 심사를 거쳐 선정되었다. 나의 동기였던 S와 J가 모두 '시 낭송 그룹'에 합격하고, 나만 고군분투 하고 있을 때였다. 곽쌤은 여전히 '네 시엔 네가 없다'며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셨다. 다섯 번째였나, 여섯 번째였나.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폭발할 때쯤, 나는 그냥 시 낭송을 포기하기로 했다.
- 쌤, 저 이번엔 그냥 시 낭송 안 할게요.
그러자 곽쌤은 더 이상 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럼 시화전 잘 준비하고, 응? 나는 곽쌤의 연구실을 나오면서 엉엉 울었다. 써갔던 시를 다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레몬 소주 두 병을 사서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 말도 안 하고 훌쩍훌쩍 술을 마시는 동안, 옆에서 S랑 J는 안절부절못하고 동동거렸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곽쌤이었다.
- 인경아. 너 지금 뭐하니?
- ...술마셔요...
- 선생님이 방금 너 선배들한테 아주 혼이 났다.
- 네?
- 열심히 하는 애를 왜 그만두라고 하냐고, 아주 J랑 L이랑... 아까 너 선배들이 선생님한테 와서 마구 혼을 내고 갔다.
선배들이 화를 냈다고? 나는 몽롱한 와중에도 어안이 벙벙했다.
- 네?
- 그래서 말인데, 한 번만 더 써보자. ... 진짜 네 이야기를 적어서 한 번만 더 써와라.
- 쌤 근데 저 지금 술 먹었는데...내일 오전에 쌤 수업인데...
- 수업 안 와도 되니까 실컷 마시고 써와 버려라.
나는 남은 소주를 다 털어 마시고 노트북을 켰다. 룸메이트였던 S는 나를 배려해 일부러 J방에서 잤다. 그날 내가 썼던 건 나 혼자 터벅터벅 마지막 하굣길을 내려왔던 졸업식 이야기였다. 너무 부끄럽고 찌질해서 아무한테도 안 했던 이야기였다. 다음날 곽쌤은 환하게 웃으셨다. 봐라, 네 이야기를 쓰라고 했잖니. 하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그때 얘길 하면 J오빠는 항상 시치미를 뚝 뗐다. 뭔 소리냐. 나 그런 적 없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나는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술자리엔 안 나가도 야, 지금 여기에 J있다. 그러면 바로 신발을 꿰어 신었다. 하도 J오빠를 따르자 주변에선 너 진짜 J오빠 좋아하냐? 라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그 말이 하도 고까워 '누굴 좋아한다는 게 연애감정만 있는 줄 알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하고 쏘아붙이곤 했다.
4학년 때, 나는 J오빠가 맡았었던 과축제 시파트 장을 맡게 되었다. 축제를 앞두고 술을 마시다가 나는 그날 시 낭송 보러 올 거냐고 물었다.
- 내가 왜?
- 아니 오실 거면 꽃다발 좀 사오시라구요. 저 매년 시 낭송 했는데 한 번도 꽃 받아본 적 없잖아요.
옆에서 H선배가 거들었다. 야, 얘가 그 시간에 일어나 있을 것 같냐?
축제 마지막 날, 시 낭송이 모두 끝나고 우리는 무대 가운데로 모여 인사를 했다.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누군가 허위허위 객석 복도를 달려 나왔다. J오빠였다. 그는 한 손으로 꽃다발을 던지듯이 건네고는 가버렸다. 걸핏하면 감동하는 내 성격에 눈물이 나올 법도 한데 그때는 웃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이게 뭐야! 꽃다발에 대한 J오빠의 일언반구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하루는 J오빠가 책장을 정리하면서 S에게 시집을 한 보따리 줬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또 대번에 나는요? 나는요! 하면서 따졌다. J오빠는 나는 S 시가 역시 제일 좋아. 하면서 딴소리를 해대고 나는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저 서울 가려구요. 그런 소리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던 때였다. J오빠에게 문자가 왔다. 집 앞 편의점에 맡긴 거 찾아가라. 낡은 가방 속에는 시집이 가득했다. 절판된 박상수 시인의 후르츠 캔디 버스도 거기 있었다.
'인경. 뭐 하나 잘해준 거 없는 선배라서 미안하다.'
대충 휘갈겨 쓴 게 분명한 문장이 엽서에 적혀 있었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아버지 같은 사람이 곽쌤이었다면, 그는 시 세계의 친오빠 같은 사람이었다.
J오빠는 걸핏하면 절교하자고 했다. 야, 너 나랑 절교하자. 다신 연락하지 마라. 처음에는 당황해서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H선배에게 연락해 J오빠가 절교하자고 하던데요. 하니 아, 걔는 그게 버릇이야. 나도 한 오천 번 절교했어. 라고 대답했다. J오빠랑 연락 안 한 지도 몇 년이 되었다. 이번 절교는 좀 오래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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