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22 시절 인연, 제철 사랑
- 백인경
- 2025년 7월 26일
- 2분 분량
언젠가 주방에 서서 사과를 깎아 먹다가 P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나 사람들이 왜 결혼하는지 알 것 같아.
왜?
과일 같이 먹으려구.
나는 집에서 혼자 술도 잘 마시고 아프면 씩씩하게 죽도 끓여 먹는다. 하지만 과일만큼은 혼자 먹는 걸 싫어한다. 왠지 과일하면 온 가족이 저녁식사 후에 둘러앉아 TV를 보면서 무심하게 집어먹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혼자 과일을 깎고 접시에 담아 거실에 앉으면 조금 외로운 기분마저 든다.
금방 상한다는 것도 과일을 잘 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예전엔 딸기나 바나나를 사면 무조건 도막도막 썰어 냉동실에 얼려 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만 두었다. 언제 넣어뒀나 싶게 냉동실 구석에 처박힌 채 서리가 잔뜩 낀 모습을 발견하거나,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가 손도 못 대고 상해버린 과일들을 보면 왜 이렇게 아등바등 바쁘게 살고 있나, 하고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P가 결혼하고, 신혼집에 처음 놀러갔을 때였다. P의 남편과는 결혼 전에도 몇 번 얼굴을 보고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어느 정도는 데면데면한 구석이 있었다. 그날 P부부는 스테이크를 구워 주었고, 나는 애플민트 화분과 하바나 클럽 한 병을 선물로 가져갔다. 실컷 먹고 마시고 P와 나는 대학 때처럼 끝없이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일 출근해야 해서, 먼저 들어가서 잘게. 편하게 놀아.
그러면서 일어난 P의 남편은 침실이 아닌 주방으로 갔고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하고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P가 주방을 향해 오빠 뭐해? 하고 묻자 놀랍게도 그는 예의 그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씻은 딸기를 내어왔다. 딸기도 먹어. 하면서. 나는 P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할 때마다 엄지를 치켜세운 것은 물론이다.
T와 J가 이사한 우리집에 처음으로 놀러 온 날은 여름이었다. 유난히 그 여름엔 복숭아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쉽게 물러버리는 복숭아는 절대 사지 말아야 할 과일 중 하나였기에, 나는 늘 과일 좌판대를 서성이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올 동안 내가 준비한 요리들은 모두 간단했다. 깡통 라따뚜이에 치즈를 잔뜩 뿌려 오븐에 돌려놓고 동네 빵집에서 마늘 바게트를 사오는 것. 편의점에서 산 닭강정을 데워 놓는 것. 준비가 끝난 후 T에게 전화를 걸어 왜 이렇게 늦냐며 독촉까지 했다. 잠시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문을 두드린 그 애들의 품에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잔뜩 담은 마트 봉지 외에 복숭아 한 상자가 안겨 있었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더 맛있는 거 해줄걸. 괜히 '나 이거 진짜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하며 오두방정을 떠는 내 앞에서 T는 의기양양해졌다. '천도복숭아 살까, 털복숭아 살까 하다가 누나가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내가 골랐어! 잘했죠?' 선물 받은 복숭아 한 상자를 온전히 먹기 위해 나는 3일간 외출할 때마다 락앤락에 복숭아를 넣어 다녔다.
마트에서 ‘과일 좀 사갈까?’ 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어김없이 그쪽을 바라본다. 중년 부부일 때도, 전화 통화를 하는 아주머니일 때도, 다정하게 팔짱을 낀 커플일 때도 있다. 과일 좀 사갈까. 그 말 되게 좋다. 나도 언젠가 저 말을 주고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잠깐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양이들이랑 나눠먹을 카스테라를 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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