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1 칫솔 정리
- 백인경
- 2025년 7월 26일
- 2분 분량
신림에서 살던 시절엔 욕실에 칫솔이 여러 개였다. 역과 거리가 가까워 찾아오기 편한 위치였기에, 지방에서 후배들이나 친구들이 올라오면 으레 우리집에서 재우곤 했다. 내가 베개를 빌려준 사람들은 다 특별하거나 친밀한 이들이었다. 가족, 사촌동생들, 친구들, 후배, 애인, 혹은 애인이 될 뻔한 사람.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새 칫솔을 꺼내주었고 칫솔들은 그들이 떠나고도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알록달록하게 펼쳐진 칫솔들은 마치 꽃다발 같기도 했다. 왜 이렇게 칫솔이 많아? 누군가 물으면 하나하나 칫솔 주인을 알려주며 타당한 이유를 들이밀었다. 이건 P꺼, 이건 민이꺼, 이건 B꺼... 근데 왜 안 버려? 얘들은 다시 올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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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렁대는 성격 탓에 어딘가를 떠날 땐 항상 두고 나온 게 없나 두 번 세 번 두리번거렸다. 그럼에도 꼭 하나둘씩 놓치는 것들이 생겼다. 이어폰이나 보조배터리나 립스틱 같은 것들. '어디'에 두고 왔느냐에 따라 찾을 수 있을 때도, 영영 못 찾을 때도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일부러 두고 오는 물건은 칫솔뿐이었다. 칫솔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나 다음에 다시 올게. 하는 것과 같았다. 다음에 다시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내 칫솔 어디 있어? 하고 뻔뻔하게 찾으면 거기 양치컵에 꽂혀있는 분홍색 칫솔. 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매번 그런 순간마다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이방인이 아닌 것 같아서. 내 칫솔, 내 자리, 내 잠옷. 내 공간이 아닌 곳에 내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기분을 좋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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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드라마 섹스앤더시티는 시즌마다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가 꼭 하나씩 있다. 시즌2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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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 '캐리'가 애인인 '빅'의 집을 방문할 때엔,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방 속에 챙겨 다녀야 했다. 우연히 가방 속 팬티를 발견한 친구들은 머쓱하게 웃는 그녀에게 아직 빅의 집에 네 서랍이 없냐며 놀라고, 이제는 너의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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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긴 물건들이 관계의 증거물이 된다면 나도 뭔가 남겨야 했다.'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캐리는 빅의 욕실에 처음으로 드라이기를 남겨놓는다. '관계의 증거물'들은 점점 다양해져 빅의 욕실장 속에는 어느새 캐리의 빗과 면도기, 탐폰, 아이리무버까지 자리하게 된다. 캐리는 손바닥만한 가방으로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됨에 만족하지만 이윽고 자신의 짐을 담은 쇼핑백을 내밀며 이거 놓고갔더군. 하고 싱긋 웃는 빅에게 두 손을 들게 된다. '내가 별종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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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의 침대에서 아침을 맞은 어느날. 그는 부시시한 머리로 일어나려는 캐리를 붙잡지만, 그녀는 귀엽게 받아친다. '내 드라이기가 우리 집에 있어. 가봐야 해.' 욕실로 들어간 그녀는 서랍을 열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다정한 모습의 두 사람이 담긴 흑백 사진. '순간 나는 아무것도 남길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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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는 집은 서울의 가장자리라서, 손님이 찾아올 일이 거의 없다. 나는 딱 내 몫의 생필품만 산다. 화려하게 칫솔이 꽂혀 있다 한들 외로움은 포장되지 않을 테고, 반대로 한 사람이 채워준 하루의 온기만으로 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도 있을 테다. 내가 반갑게 현관을 열어주는 이들은 늘 오래 기억될 특별한 사람들이니까. 그 애들의 욕실에 내 칫솔이 없다 해도, 우리는 같은 샴푸 향이 나는 사이라는 거. 그게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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