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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0 흔들의자가 있는 곳

엄마와의 통화에서 왜 갑자기 그 광경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등에 업은 아기를 어르며 빌라 앞을 서성이는 젊은 엄마를 보았다. 아기 엄마가 나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여서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업힌 아기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아직 다 안 울었다는 듯 어깨를 포롱포로롱 들썩이고 있었다. 엄마는 좀 지쳐 보였다. 양손으로 아기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잔잔한 파도처럼 몸을 움직였다. 아기가 다시 칭얼대자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를 몇 바퀴는 돌아야 할 터였다. 그녀의 둥근 등을 떠올리며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어릴 적에 많이 울었어?

아니. 니나 인태는 순했지. 울진 않고 말을 일찍 떼서 사람을 귀찮게 했지. 오죽하면 이모들이 니랑 같은 차에 안 탄다고 안 했겠나.

그럼 엄마는 나 때문에 속상했던 적 없어?

왜 없어. 고등학생 때 이상한 동아리에 미쳐 살 때는 속에서 천불이 났구먼.


엄마가 말한 '이상한 동아리'는 댄스부였다. 그러니까 엄마는 댄스부가 아주 불량써클인 줄로 오해한 거다. 불량은 커녕 선배들은 '우리는 댄스부니까 조금만 교칙을 어겨도 크게 밉보인다.'며 선생님들보다 더 엄하게 후배들의 학교생활을 관리했는데. 그래도 조금 의외였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문창과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거나 서울로 상경하겠다며 무작정 짐을 쌀 때를 이야기할 줄 알았다. 내 물음에 엄마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건 속상한 것보다 섭섭했던 거고.


나는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흐흥, 웃으며 전화를 끊고, 엄마를 속상하게 할 비밀들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욱여넣을 때, 애인이 제 친구와 바람났을 때, 처음으로 담배를 배울 때, 3일 동안 혼자 앓아누웠을 때,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낼 때, 누군가 우리 집을 훔쳐볼 때, 저녁을 굶으며 내리 야근할 때. 나는 괜찮지만, 엄마는 안 괜찮을 나의 모습들을.


자존감이 낮아질라치면 M언니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는 너희 엄마 아빠가 이렇게 예쁘게, 소중하게 키운 딸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럼 행복해져야 할 타당한 자격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집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줄 알지만 나는 발목이 부을 때마다 여전히 거기 기댄다. 지진 같은 감정들을 감당하기엔 아직 쉴 곳이 없어서.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땐 멀미가 더 심해서 두시간 거리의 외갓집에 가기 위해서는 붙이는 멀미약, 마시는 멀미약으로 무장을 했다. 나는 늘 길을 잘 잃는 아이, 균형 감각이 없는 아이였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면, 처음과 다른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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