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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31 아직 반짝반짝해

2019년은 유난히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연례행사처럼 사진첩을 찬찬히 거슬러 가보니 바쁘긴 참 바빴구나. 봄에는 낭독회, 여름엔 광시증, 가을엔 겉멋프로젝트, 겨울엔 온갖 파티와 행사들. 잠시도 쉬는 기간이 없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 그냥 너무 피곤할 때면 '내 몸이 여러 개였으면 더 많은걸 할 수 있을 텐데.'하는 아쉬움 정도가 슬쩍 떠오를 뿐이었다. 올해 새로 쓴 시를 세어보니 거진 스무 편 정도가 된다. 늦어도 내후년 봄까지는 두 번째 시집을 세상에 보일 것이다. 고작 2년 만에? 너무 급한 거 아니야? B의 걱정스러운 충고에 나는 비밀을 털어놓듯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나는 잊히기 좋은 사람이거든.


나는 발목도 약하고 지구력도 약해서 달리기를 못 한다. 대신 아주아주 오래 걸을 수 있다. 벌교에서 순천까지 국도를 걸어본 적이 있다. 약 여섯 시간 동안, 워커에 보스턴백 차림으로. 육체의 피로함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잊을만하면 도로변에서 마주치던 동물들의 사체가 나를 기겁하게 했다. 같은 길 위에서 실패한 존재들의 초점 잃은 눈빛이 가장 두려웠다. P는 사람을 볼 때 눈빛을 본다.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엔, 거울로 본 자신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고 엉엉 울었었다. P가 내 친구들을 좋아하는 이유도 맑은 눈빛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P를 만나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묻는다. 나 괜찮아? 나 괜찮겠지? 하면 P는 웃으며 괜찮아. 반짝반짝해. 라고 말해준다. 반짝반짝한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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