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20 사과는 달고 따뜻해
- 백인경
- 2025년 7월 26일
- 2분 분량
'배려'는 내가 사람을 사귈 때 가장 먼저 따지는 조건이다. 그것은 단순한 친절에서 보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 깊은 태도에서 느껴진다.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얼마만큼 나를 생각해 주는지, 서로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절실한지,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지 은연중에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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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로 향하는 셔틀버스는 한적했다. T와 J는 을지로에서, 나는 종합운동장에서 각각 탑승했다. 새벽에 일어나 피곤했을 텐데 그 애들은 내가 먹을 김밥과 음료수까지 살뜰하게 챙겨놓았다. 워터파크에서는 아이처럼 신나했고 북적이는 시장에서 장을 볼 때는 계속해서 내 컨디션을 살피고 북돋아 주었다. 나는 친한 친구들 앞에서 종종 철없이 어려지는 것 같아 민망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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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여행이 그러하듯, 본격적인 술자리에 앞서 배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게딱지에 비빈 밥을 떠먹여주고 상추쌈을 입에 넣어주면서 각자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떠들었다. 그러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바톤을 이어받듯 자연스럽게 주제가 확장되었다. 마치 파문처럼. 우리는 거기서 물장구치듯 서로의 사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중에는 듣고 또 들어도 매번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그 애들은 똑같은 이야기라도 말을 재치있게 꾸며서 두 번 세 번 나를 웃게 만든다. 한참을 신나게 떠들다 보니, 맥주를 두어 캔 남기고서야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었어. 사과하는 사람의 눈은 슬펐던 사람의 눈보다 더 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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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게 우리를 더욱 견고하고 돈독하게 만든다. 그 세글자는 벽돌 틈 이끼처럼 촉촉하고 따뜻한 감정과 함께 자란다. T와 J는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 번, 헤어질 때 한 번, 헤어진 후에 또 한 번 여행에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한 건 리조트를 빌린 것뿐이고, 사실 그건 여행경비의 큰 지분을 차지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괜히 머쓱해져선 다음엔 더 좋은 곳으로 놀러 가자! 내가 빨리 유명해져야지! 하고 장난스레 되받아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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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엔 P의 생일이었다. 괄호의 방 전시 직전이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시기였다. 전시 셋업을 도와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시계를 본 순간 불현듯 P의 생일이 30분도 채 남지 않은 걸 알아챘다. 엉망진창으로 친구들과 부른 생일축하 노래와 함께 메세지를 전송했다. 그날 저녁, P와 통화를 했지만 계속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다 어젯밤, P 생일 선물은 뭘 사주지. 메세지를 보내야 하는데. 그러다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염치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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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P에게 장문의 사과 메세지를 보냈다. 언니에게 보내는 밉상 동생의 메세지 같기도 하고 다툰 연인에게 보내는 메세지 같기도 했다. 행여 그녀가 나를 걱정할까 봐 긴 메세지의 끝은 '민망하고 쑥스러우니까 생일선물 피드백만 주면 좋겠어 그럼 이상이야 안녕 사랑해' 하고 허둥지둥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P로부터 온 웃음기 섞인 답장을 오래 되뇌었다. '난 잠시 너를 기다리는 중이었어.' 그건 정말 나를 잘 아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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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팔랑거리며 샛길을 기웃거리길 잘한다.나의 배려는 고작 '잠시만 저기 다녀올게' 하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어떤 애인은 더 아프게 손을 움켜 쥐었고 어떤 애인은 시큰둥 떠나갔지만. 길을 잃어도 외롭지 않았던 이유를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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