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10 옥상달빛
- 백인경
- 2025년 7월 26일
- 2분 분량
딱 이맘때였을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될 무렵. P와 나는 선선한 밤날씨를 즐기기 위해 캔맥주를 들고 기숙사 근처 초등학교 스탠드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실감 안 나지 않아? 이제 한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이라는 게.
그러게. 진짜 미친짓도 별로 못해봤는데.
…너 1학년 때 단대 축제에서 혼자 춤춘 건 미친짓 인정한다.
야 심지어 손담비 노래였잖아. 미쳤어.
그런 미친짓 말고 뭔가 재밌는 거 없을까?
우리 전에 얘기했던 인예대 야외취침은?
오 그거 괜찮다.
괜찮지. 내일 수업 뭐지?
열한시 김영학 쌤 희곡창작.
시간 딱 좋다. 옥상 가서 자고 아침에 이불 조교실에 맡겨 놓고 바로 수업 들어가면 되지.
더 추워지면 못해.
어 못해. 가자.
우리는 그 길로 기숙사에서 이불과 스탠드를 껴안고 멀티탭을 주렁주렁 달고 캔맥주와 과자가 든 편의점 봉지를 손목에 낀 채 인예대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가 멀티탭을 주루룩 연결해서 스탠드를 켜는 동안 P는 옥상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 이불을 깔았다. P가 음악을 틀자 내가 캔맥주를 땄다. 아주 손발이 척척 맞는 환상의 콤비였다. 우리는 책을 좀 읽다가 맥주를 마시다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근데 별은 별로 안 보인다. 그치.
응. 코 시리지 않냐.
시려. 그리고 좀 추운 것 같애.
아침 되면 더울 거야.
그래. 자자.
다음날 아침, 우리는 서로의 몰골을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밤새 초가을 추위에 얼었다가 녹은 코는 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고 바람이 어찌나 불었던지 머리도 산발이었다. 맥주를 그렇게 마시고 잤으니 퉁퉁 부은 얼굴은 말할 것도 없지. 조교 선생님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이불을 받아 조교실 소파에 올려 주셨다. 그 날 오후, 곽재구 선생님의 시 수업에서 우리는 얼떨결에 모범생이 되었다.
오늘 제가 아주 기특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침에 조교실에 갔더니 웬 이불이 있기에 이게 뭔지 물었더니 글쎄 어젯밤 우리 과 학생이 옥상에서 자고 갔다는 얘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업보다 더 값지고 훌륭한 경험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그 학생들을 위해 박수를 한 번 쳐주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자, 백인경과 김소영이를 향해 박수 쳐주세요.
우린 술 먹고 이불 깔고 밖에서 잔 것뿐인데,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박수까지 받고 말았다. 선생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선생님 죄송해요. 아직 야외취침을 주제로 한 시를 쓰진 못했습니다. 다만 여기 이렇게라도 글로 남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실 야외취침 사건이 아니더라도 인예대 옥상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학교 건물 중에서도 높은 곳에 있어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다. 새벽에도,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수업 시간 중간에도 나는 종종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밤중 애인의 손을 잡고 ‘여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하고 자랑하길 좋아했다. 거기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합평도 했다. 난간에 앉아 저 멀리서 올라오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어 대다가 정작 내가 수업에 늦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학교에 내려갈 때마다 친구들을 졸라 인예대로 향했지만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 자물쇠로 잠겨 있던 문 앞에서 내가 그제야 이방인이 된 것 같아 조금 슬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금세 안녕, 하는 마음으로 자주 찾던 술집을 향해 떠들며 내려가는 것. 나의 스물 세 살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씁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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