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0 T 이야기
- 백인경
- 2025년 7월 26일
- 2분 분량
나는 첫인상을 잘 맞추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섣불리 인상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도 첫인상의 임팩트가 예사롭지 않을 땐 어쩔 수 없다. T에 대한 첫인상은 '뭐 저런 양아치가 다 있을까?’ 였다.
T와 나는 입사 동기였다. 첫 회사에 출근하던 날, 같이 면접을 봤던 동기들끼리 모였다.
어, 그런데 그 취미팀에 남자 에디터분은 안보이시네? 출근 안 하시나?
몸이 안 좋아서 병가 냈대요.
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웃기시네. 백 퍼센트 술병이구만. 입사 첫날부터...어떤 앤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렇게 츠츠 혀를 차던 T와 친남매처럼 매일 붙어 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
T에게 처음 말을 건 것은 그 다음날 점심 때였다. 그 당시 T의 상태 대화명이 흥미를 끌었다.
‘등장한 권총은 반드시 쏘아져야 한다.’
T님, 연극 좋아해요?
네. 왜요?
상태 대화명이 안톤 체홉이길래.
어, 이거 알아요? 뭐 좋아해요? 연극 봤어요?
안톤 체홉 연극은 많이 봤어요. 벚꽃 동산도 보고… 나는 갈매기 좋아해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가 술술 통해 어느새 퇴근 후 동기들과의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머리에 든 거 없이 놀 궁리만 하는 줄 알았던 T는 보기보다 생각이 많았다. 또 자기주장을 기분 나쁘지 않게 펼칠 줄 아는 애였다. 얘랑 놀면 재미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T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말복이었고, 분당에 있는 학원에서 수업을 마친 후였다. 집으로 가려는데 T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뭐해요?
이제 집 가려고. 학원 수업 끝났어.
오늘 말복인데! 우리 닭 먹으러 가요. 내가 양파닭 끝내주는 집 아는데.
오늘은 피곤해. 복날은 매년 오는데 뭘 그렇게 꼬박꼬박 챙기고 그래.
누나, 생각해봐요. 복날은 매년 오지만 2013년의 말복은 인생에 딱 한 번밖에 안 와.
나는 아직도 이 말만큼 깔끔하게 나를 설득하는 문장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맥주에 양파닭을 뜯으면서도 T는 신기한 말들을 계속 쏟아냈다. 쓰고 있는 시나리오에 대해, 인간관계, 연애… T는 자기 말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야기가 끊기지 않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T와 나는 같은 동네에 살았다. 녀석은 큰길 밖에 몰랐던 내게 신림 뒷골목 구석구석을 알려주었다. 퇴근 후에는 가끔 술을 마셨는데, 거의 즉흥적이었다. 그날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가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별일 없는 하루였고 별일을 만들고 싶었던 우리는 집에 가서 제일 웃기고 어이없는 옷으로 갈아입고 만나기로 했다. 술집에 가서 직원에게 누가 더 또라이 같냐고 물어보기로. 덜 또라이 같은 사람이 술을 사기로 했다. 꼴에 자기들 동네라고 밤중에 둘 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나왔다. 결과는 T의 승리였고 나는 이를 갈며 술을 샀다. 가끔 구제시장이나 해외에 나가서 미친 옷을 볼 때마다 나는 이날을 생각한다. 이거라면 이길 수 있겠는데.
T가 입원했을 땐 책을 다섯 권인가 사다 줬다. 문창과 선후배들을 제외하고, 내 책 선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애는 처음 봤다. T는 그 책들을 다 읽었고 우리는 그 책 이야기만으로 일 년은 넉넉히 재미있었다. T는 내게 ‘표백’을 추천했고, 나는 영화 ‘엘비라 마디간’을 추천했다. 내가 하도 이야기를 많이 해서 녀석은 영화를 안 봤어도 너끈히 아는 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T와 안 지도 6년이 다 되어간다. 서로 바빠서 한참 안 볼 땐 거의 2년간 안 만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만나면 항상 어제 만난 것처럼 즐겁다. 내 북토크에 오기 전에 T는 뭘 입고 가야 하냐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리고 그날 꽃다발 대신 화분을 들고 왔다. 꽃은 시들잖니. 무슨 마틸다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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