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07 P 이야기
- 백인경
- 2025년 7월 26일
- 2분 분량
역시 우리는 나쁜 짓을 하면서 친해진다. P와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했지만 사실 단둘만 친한 건 아니었다. 네 명이 같이 다니는 무리 중 한 명이었고, 내 룸메이트는 다른 친구였다. 그러다 학년이 올라가고 P와 나는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P에게 내가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P는 흔쾌히(아마도) 받아들였다. 새로운 룸메이트로 P를 생각하기까지는 ‘지갑 사건’이 한몫을 했다.
우리는 학교 근처 예식장에서 주말마다 예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날 에어컨 옆에 떨어져 있던 지갑을 주웠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식은 시작되어 사람들은 앞만 보고 있었고 가까이에는 P가 있었다. 어쩌지, 말할까. 안에 얼마 들었는지 궁금한데. 데스크에 갖다 줘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P가 내게 다가왔다.
뭐해? 준비하자.
어? 나 이거 주웠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된 나는 불쑥 지갑을 보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이미 머릿속이 욕심으로 차서 내가 지갑을 훔치다 들킨 것처럼 조금 주눅이 들고 버벅거렸던 것 같다. 그러자 P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바짝 붙었다.
열어보자, 얼마 있는지.
지갑 안에는 현금은 없고 신용카드만 가득했다. 우리는 실망한 기색으로 조금 침묵했다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날 이후 나는 P랑 더 친해져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P와의 에피소드를 다 쓰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다.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둘 다 수업을 빼먹고 옥상에 가는 걸 좋아했고 잔디밭에서 낮술 먹는 걸 좋아했다. P와 여름방학 때 여행을 약속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관령에 있는 양떼목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여기가 지상낙원 같다고 동시에 외쳤다. 양에게 풀을 주면서 웃고, 햇볕 때문에 신문지로 만들어 쓴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도 숨넘어가게 웃었다. 실컷 놀고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나는 먹을만한 게 없나 매점을 두리번거리다가 P를 찾았다. 벤치에서 P를 발견했고 옆에는 모르는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P가 갑자기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할머니! 가족들이랑 오셨어요? 너무 좋죠?
나는 안 올라가. 다들 구경하러 갔어.
할머니는 왜 안 올라가세요?
다리가 아퍼서 못 올라가. 여기서 쉬고 있는 거야.
그러자 P가 냉큼 제 카메라를 꺼내 할머니께 내밀었다. 이거는 큰 양들이구요. 여기로 가면 양들 건초도 줄 수 있어요. 근데 건초는 사야 해요.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니까 이런 게 있었는데요.
P는 조잘조잘 할머니께 양떼목장을 그려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얼굴이 환해지시고, 나는 P가 진짜 좋아졌다.
우리는 계속 같은 방을 썼고, 4학년 때는 함께 자취했다. 졸업 후 P는 대전으로, 나는 서울로 갔지만, 애인보다 더 자주 연락을 주고받아서 공백을 느낄 틈이 없었다.
P의 결혼식은 내가 애인과 헤어지고 딱 일주일 뒤였다. 나는 P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P는 혹시라도 마음 불편하면 축가는 안 불러줘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고작 헤어진 남자 때문에 인생에 한 번만 줄 수 있는 선물을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결혼식 날 아침에 내려가겠다고 하니 P는 전날 자기 집에 와서 자고 가라고 했다. 나는 염치도 좋게 케이크를 사서 P네 집으로 갔다.
이런 날은 식구들끼리 보내야 하는데, 제가 껴서 어떡하죠. 죄송해요, 어머니!
인경이도 우리 식구지, 무슨!
제가 내일 축가 재미있게 잘 부를게요!
그러나 P의 어머니는 모르셨을 것이다. 내가 다음 날 어떤 꼴을 하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 P의 결혼식장에서 나는 망사스타킹에 핫팬츠를 입고 서문탁의 사미인곡을 불렀다. 하필 축가 부르는 자리가 시부모님 앞이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P의 표정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날 다른 사람들은 다 웃고 P는 울었다.
아니 내가 춤까지 추면서 흥겹게 노래를 불러줬는데 울긴 왜 울어
몰라. 딴 사람들도 다 넌 왜 이상한 포인트에서 우냐구 물어보더라.
진짜 왜 운 거야?
눈물이 나는데 어떡해!
P는 항상 쌍둥이 언니처럼 나를 챙긴다. 내가 술에 진탕 취해 들어오면 클렌징 티슈로 화장을 지워주고 잠든 나의 눈알을 까뒤집어 렌즈를 빼주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우리 둘이서 여행가자! 라고 해놓고 흐지부지 어느새 서른이 다가오고 있다. 괜찮아. 그럼 서른 기념으로 가지 뭐. 서른에도, 마흔에도 나는 P를 계속 좋아할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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